
장보고 어린시절
장보고는 청해진(현 완도) 출생으로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 질을 타고 났다. 그의 이름 장보고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궁복(弓福) ,궁파(弓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인 '활바' 또는 '활보'라는 이름을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유래된 이름이다.

당에서의 활약 (무령군중소장 시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장보고는 신라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보았으며, 골품제도 하에서는 신분상승의 한계를 느껴 당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꿈을 키우는 기회의 땅 당(唐)으로 갔다. 이때가 20대 초 · 중반이었으며, 10세 아래인 정년과 함께 바다를 건넜 다. 당으로 건너간 장보고는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이라는 군대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30세(819년)에 병사 약 천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軍中小將)의 직위까지 올랐다.

당에서의 활동 (적산 법화원 설립)
무령군 군중소장 직을 그만 둔 장보고는 산동반도 적산포에 적산 법화원을 세워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재당 신라인사회에 영향을 주었다.구법(求法)과 무역 등을 위해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일을 보았고, 재당 신라인과 함께 예불도 보고 정보도 교환하였다. 그야말로 법화원은 교민의 사랑방 기능을 하였다. 또한 항해 전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적산 법화원은 장보고의 젊은 날 피와 땀이 서린 곳이며, 당나라에 사는 신라사람들의 꿈과 희망의 중심지였다. 특히 일본 승려 엔닌은 이곳 법화원에 머물면서 장보고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귀국을 보살펴 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장보고의 국제적인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해적들의 양민 납치
9세기 초 바다는 해적들의 천국이었다. 해적들은 당시 정국 불안으로 변방과 국경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신라 연안을 자주 약탈했다. 중국의 많은 역사책에 등장하는 신라노(新羅奴)는 당시 해적에게 잡혀 노비로 팔리는 신라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에서 무령군소 장으로 근무하던 장보고는 이러한 신라노의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신라로 돌아가 이들을 소탕하고 바닷길을 개척하리 라 결심하게 된다.

흥덕왕 알현과 해적소탕
장보고는 당나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을 거느릴 수 있는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허락 받았으며 대사(大使)로 임명되었다. 대사는 일종의 총독으로 청해진 지역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우두머리였다. 청해진 설치의 표면적 이유는 신라 해안에 출몰해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납치하여 당에 노비로 팔아넘기던 해적을 소탕하는 것이다. 실제로 장보고는 신라와 당 해상 교통로에 있는 해적을 말끔히 소탕하였다. 이와 함께 군소 해상세력 통합, 신라방에 있는 재당 신라인 연결, 해상 무역권 확보 등 짧은 시일 내에 조직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청해진 설치 / 동아시아 해상무역 기지 '청해진'
청해진은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의 변방민을 잡아다가 노비로 팔거나 분탕질을 일삼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설치되었다. 장보고는 군사 1만을 얻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소탕하였다.이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청해진본영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해양을 개척하였다.장보고는한국과 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항로를 개척하였으며,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실시하고,이슬람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기업인이자세계적무역왕이 되었다.

장보고 선단의 문화교류 활동
중국과 일본에도 거점을 확보한 장보고선단과 청해진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한・중・일을 잇는 대외 해상무역활동의 본거지였다. 장보고선단은 중국 남부지역에 까지 진출하여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역해 이슬람 도자기, 유리제품 등을 신라와 일본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위 쟁탈전과 장보고 암살
청해진 설치 후 동아시아 해상세계를 석권한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839년 장보고는 경주로 군사 5천을 보내 김우징의 정적들을 격파하고 김우징이 왕위(신무왕)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 2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장복(진골 귀족의 관복)을 하사하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김양을 비롯한 경주 귀족들의 불안은 노골적인 적대 의식으로 바뀌었다.그들은 섬 출신 지방인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명분아래 장보고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시작했다.마침내 김양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장보고에게 보냈다.장보고는 돌아온 옛 부하 염장을 반갑게 맞으며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연회가 무르익을 때 염장은 칼을 빼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이때가 841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