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유적지
- 지정현황 : 사적 제308호(1984년 9월 1일 지정
- 위 치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9외
- 장도면적 : 125,400㎡(38,000평)
- 발굴기간 : 1991~2001년
- 목 적 : 청해진과 관련하여 유적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 고증과 정비,복원
- 발굴기관 : 국립문화재연구소

청해진설치 신라 흥덕왕 3년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중심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이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청해진 본영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해양을 개척하였다.장보고는 한국과 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항로를 개척하였으며,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실시하고, 이슬람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 기업인이자 세계적 무역왕이 되었다.
발굴전 청해진 인근지역 주민들의 밭으로 이용되던 장도 청해진 유적지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59년 9월 17일 시라호 태풍이었다. 사라호 태풍이 1200년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청해진 유적의 흔적인 목책을 일부나마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이후 1982년에는 국립문화재 연구소 학술조사단이 장도유적과 법화사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이 한국방송공사 신춘원단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어 청해진에 대한 학계와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이키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 결과 1984년 장도유적은 사적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1년 청해진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주요발굴성과 (1차발굴:1991~1998) 판축토성으로 이루어진 890m에 달하는 성벽과 내부건물지, 굴립주 건물지, 매납유구 등을 확인한 바 있으며, 또한 331m에 달하는 해안 원목렬의 분포 범위 확인과 함께 총 3만여 점이 넘는 많은 유물을 발굴하여 장도가 청해진의 주요근거지였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매납유구는 직경 1m, 깊이 150cm 정도의 원형 구덩이 안에 인위적으로 유물을 매납한 제사와 관련된 유구이다. 수혈 중앙의 가장 바닥에 회청색 경질 대응을 똑바로 안치하고, 대옹과 수혈벽과의 사이에토기편병 2점, 철제 솥 2점 한 개체를 반으로 절단하여 각각 나누어 묻은 철제 반 1점, 청동병 1점, 철제 자물쇠 등의 철기류를 배치 매납하였다.이들 유구와 유물은 청해진 조음도에서 증사를 거행했다는 삼국사기 권 32 잡지 1제사조 의 기록과 견주어 검토해 보아야 할 자료이다. 또한 국가 제사인 중사가 지내졌던 장도유적은 청해진 내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발굴전 장도 청해진 전경
청해진유적 복원계획 조감도
현재 청해진완도 전경
주요발굴성과 (23차발굴:1999~2001) 7차 발굴조사에서는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안 출입 겸 접안시설로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 등 중요 유구들을 발굴하여 청해진의 본영(本營)이 바로 이 장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8차 발굴조사에서는 섬 입구 해안지대에서 노출 된‘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의 구조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지어 그 구조를 파악하였으며, 그 앞의 바다 해저 면에서 기존에 이미 알려져 있던 원목렬과 나란히 또 하나의 목책렬이 지나가고 있음을 새로이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성벽에 나 있는 배수구를 처음으로 발굴조사 하였고, 청해진의 판축토성 성벽이 내외측 모두 2중 기단석렬을 깔고 조성한 것도 함께 밝혀냈다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는 21×22m 정도의 규모로서 내외측에 기단석렬을 깔거나 석심을 쌓고, 그 사이에 판축다짐을 하여 만든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물은 깊이 6m로서 바닥에는 통나무를 단 ‘井’자형으로 깔아 기초를 잡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가 좁고 (직경 150cm 내외) 중간이 약간 넓어지다가(직경 180cm 내외) 바닥은 다시 좁아지는 모양이다. 우물의 바닥에는 자갈을 약 50cm 두께로 깔아 물을 정화할 수 있게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우물 바닥에서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등의 토기류와 재갈편 철제자귀, 금제고리 등의 금속제 유물 그리고 어망추, 방추차, 숫돌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편병류는 구연부만 파손된 채 4점이 나란히 깔려 있어 우물을 축조할 때에 의도적으로 매납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여 지며, 이는 우물의 축조및 사용 시기가 청해진 성의 축성 및 운용시기와 동일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깊이 6m의 이 우물은 청해진 뿐만 아니라 항해 하는 장보고 선단의 주요 식수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도 서쪽 저지대에서는 성벽의 사이에 좌우 양쪽으로 석축을 하여 막음을 하고,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물이 스며들게 하는 암거식 배수구가 조사되었는데 입구가 깔때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물이 잘 모여들게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판축토성의 배수방법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장도 청해진 유적에서 발굴조사된 수 많은 유구와 유물들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기초 자료 가 될 것이며, 특히 절대연대가 9세기 전반인 많은 유물들은 앞으로 통일신라시대의‘표지유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사업명칭 : 장도 유적 정비 복원 공사
- 위 치 :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787(장도 일대)
- 공사기간 : 2001 ~ 2009년
- 공사현황 : 토성 보수공사, 조경 공사, 탐방로 조성, 유구 복원, 매단 석축 정비, 사당 복원, 외성문 복원, 내성문 복원, 고대 복원, 우물 정비, 굴입주 정비 안내판 설치 등등
완도법화사지
- 소 재 지 : 전라남도 완도군완도읍 장좌리 461외
- 지정현황 : 전라남도 기념물 제131호(1990년 2월 24일 지정)
- 면 적 : 1,881㎡(569평)
- 발굴일정 : 총 2차(1990년)
- 발굴기관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발굴목적 : 이 유적은 장보고(청해진)와 관련하여 유적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 고증과 정비 복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
- 발굴내용 : 법화사는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천태종 계열의 사찰이다. 법화사는 청해진 세력과 무역상인들, 당나라로 가는 구법 승려들의 예배당이자 휴식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총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옛 절터(건물지 7곳)와 기와편, 주름무늬병, 해무리굽 청자편,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주름무늬 토기병 편(8~9세기 유물)과 해무리굽 청자 편 등의 발굴 유물을 통해 살펴 볼 때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 경까지도 사찰의창건 및 조영시기를 상한 시킬 수 있다. 01. 1990년에 실시 된 발굴조사가 사찰 전 영역에 걸쳐 실시되지 않은 한계와 그 결과 매장 유물 전체를 볼 수 없었다는 것과 이런 제한적인 결과를 가지고 사찰의 창건에 대해 결론을 성급하게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 02. 발굴 유물 중 주름무늬 토기병은 그 사용시기의 상한이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중 후기(8~9세기)대 까지도 올려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다. 03. 장보고 대사의 활동 중 중국 법화원 설립을 고려한다면 청해진 본거지인 완도에도 사찰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04. 장보고가 창건하였다는 법화사로 추정한다면 851년 청해진의 혁파로 사찰도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법화사지
-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 지정현황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13호(1971년 지정)
- 발굴내용 : 제주 법화사(法華寺)는 9세기 초 청해진 시기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법화사지는 제주도의 남쪽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다. 제주도는 일찍이 백제세력권 하에서도‘탐라’라는 국호로 대외교류를 한 지역으로 662년(신라 문무왕 2년) 신라에 예속된 이후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고대 범선 항해는 조류의 흐름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주산군도에서 한반도로 출발하면 서남해 지역이나 제주도는 반드시 지나게 되는 항로였다. 일본 승려 엔닌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항해 할 때도 제주도 남쪽을 거쳐 갔다.

이처럼 제주도는 한반도↔제주도↔중국, 중국↔제주도↔일본, 중국↔한반도↔제주도↔일본 등 여러 국제교역루트에서 징검다리와 같은 곳이었다.장보고는 이러한 중요 기착지인 제주도 남쪽에 법화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이 사찰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긴 여정의 바닷길 항해에서 안전과 무역상인들의 정신적 휴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1990년에 제주 법화사앞 대포항(옛 당포)에서 완도 법화사와 동일한 주초석이 발견되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법화사지는 1982년 명지대학교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한 후, 1990~199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7천여 평의 유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절터와 기와편, 상감청자, 백자, 분청사기, 청동등잔, 석제 불상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 대웅전 터는 108평 규모였으며, 기단의 지대석은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인 경주 불굴사와 같은 2단 구조를하고 있었다.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
- 소 재 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읍동
- 지정현황 : 상라산성(上羅山城)은 흑산도의 상라산 8부 능선에 반달 모양으로 축성된 석성이다. 이 성과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이 9~10c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