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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유래 및 연혁

노화읍의 유래

대당마을에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 북방식 고인돌이 있어 선사시대 이전에 염등마을에 입도하여 거주했을 거라고 추정되며, 시대미상이나마 제염을 하였다고하여 염등마을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논으로 변했으나 마을앞에 300㏊에달하는 갯벌에 갈대가 서식하고 갈대 꽃이 만발하여 노화라 칭하였다 한다.

노화읍의 연혁

  • 1694년 영암군에 속함
  • 1870년 삼도진설치(노화도, 보길도, 넙도)
  • 1896. 4. 1 완도군 설치(노화면, 보길면, 넙도면으로 분면)
  • 1916 노화면으로 통합
  • 1964. 8. 24 넙도출장소 설치
  • 1980. 12. 1 노화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10050호)
  • 1982. 10. 1 보길출장소 설치
  • 1986. 4. 1 보길면 분면

마을유래

잘포리

1930년경 이웃마을인 이대리 박만수 이거, 농업 위주로 살면서 점차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삼도진 뒤편 작은 포구라 해서 자기포금미가 소당리 4반에서 里로 승격될 때 초대이장 김윤석이 주민들과 협의 잘포리로 개칭
  • 전설 : 마을앞 해변 불썬지구에 용왕이 살고 있다는 전설에 의하여 매년 정월 보름날에 무당내림굿(무당이 되기 위하여 하는 의식)과 씻김굿(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는 씻김)을 행하고 마을의 무사고와 당년을 기원한다.
  • 특기사항 : 어촌마을로 김양식이 주소득원 이었으나 점차적으로 전복양식어업으로 전환하는 추세임.

당산리

초계최씨가 처음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호구총수(1789년작성)에는 당산, 당포리 2개마을로 되어 있음
  • 전설 : 400여년생 팽나무를 성역화 하여 고사를 지내며 풍어와 마을의 평년을 기원해 왔다는전설이 있음
  • 특기사항 : 김양식을 주업으로 생활하여 왔으나 최근들어 전복양식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임.

노록리

약130년전 당산리 마을에 사는 김유용씨가 처음 입도하여 조그마한 섬마을을 이루었음. 1963년 11월 1일 당산리에서 분리(법령1175호)

  • 지명유래 : 썰물일 때 모래 등이 보여 노루목 같이 생겼다하여 노리기라 불려오다가 노록도로 고착됨.
  • 전설 : 마을앞에 울창한 방풍림이 있는데 이 울타리가 마을 주민들의 보배와 같아서 바다에 나가 고기를잡아오면 제일 큰 고기를 차려놓고 제를 올리면서 수난이 없도록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성역처럼 지켜 온다는 전설이 있음
  • 특기사항 : 간조시 자연적으로 당산 마을과 연결되어 자칭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며 매년 정초에 당제를 모시고 있고 “유왕”이라는 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음.

삼마리

효종대에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처음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처음 입주한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삼막사를 지었다 하여 삼막동이라 하였다가 그 뒤 삼마리라 개칭하였음.
  • 전설 : 삼막산제 -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풍년풍사와 주민안녕을 기원하는 삼막산 봉우리(속칭 용마위)에서 지냈다.
  • 특기사항 :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었으나 김양식 소득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음.

미라리

200여년전 익산 씨가 처음 입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

  • 지명유래 : 노화도에서 유일하게 미역산지여서 “믹날”에서 어원 변화를 거쳤다고 추정됨. 호구총수(1789)에 미라포리로 나타남.
  • 전설 : 농토가 협소하여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동안 잦은 해상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 매년 섣달 그믐날 마을 앞바다 무인도인 “석도”의 용왕께 무사고와 풍어를 맞을 수 있도록 푸닥거리(무당굿)와 함께 제를 올렸다는 전성이 있음.
  • 특기사항 : 농토가 협소하여 빈약한 마을이었으나 김양식 소득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현재는 전복양식을 주업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음

북고리

김해김씨가 처음 입주하여 밭농사 위주로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마을 서쪽 굴에서 용이 나왔다하여 마을명을 “용왕구미”라 부르다 1916년 북고리라 개칭하였음. 삼도진 所가 북으로 튀어나와 북고지(北古地)라 부르다 개칭됨.
  • 전설 : 마을 서쪽 굴에서 용이 나왔다하여 마을앞 동산에 돌을 쌓아 용왕당을 만들고 매년 정월 초하룻날 깨끗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음.
  • 특기사항 : 약 40년 전만해도 아주 영세한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김 양식으로 부유한 마을이 되었음

신리

광해군대 김씨, 최씨가 처음 입주하여 살았으나, 후손이 없었으며 그후 나주임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음

  • 지명유래 : 신목과 구목 사이의 마을, 사이몰→새목→신리로 변형되어 고착되었음. 산양진이 편입됨 (1917년)
  • 전설 : 정월 대보름이면 동쪽과 서쪽 두편으로 나누어서 마을의 농경지를 돌며 농악놀이와 함께 지신밟기(보리밭밟기)를 하고, 끝나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윷놀이와 줄다리기를 하여 우승편에게 패한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제공하는 풍속이 전해오다가 현재는 그 풍속이 점차적으로 없어지고 있음.
  • 특기사항 : 민경산업-1970년대부터 납석광산이 개발되어 광석을 일본 및 대만에 수출하고 있음.

양하리

  • 지명유래마을주변산쳔에 버들나무가 많아서 마을이름을 揚下理라 불러오다가 그후 마을사람들의 마음씨가 어질고 성품이 착하여 良下理라 개칭하였음. 신목리를 웃마을 양하리를 “아랫마을”이라 부르는 뜻도 있음.
  • 전설시집오던 가마는 마을앞에 있는 저수지 둘레를 한바퀴 돌아서 마을로 오게 하였고 저수지를 한바퀴 돌고 오지 않으면 아예 신랑집에서 신부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내용인즉 저수지를 신부 가마가 한바퀴 돌고 오면 연중 비가 충분히 내려서 평년농사가 된다고 하였음.
  • 특기사항버드나무 : 200년산, 높이 21m, 둘레2m, 면적 599㎡

신목리

仁祖代에 창원황씨, 황득추씨가 처음 입주하여 정착, 협소한 농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울창한 산림을 개발하면서 점차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여러갈래의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목재”라는 어원이 잔조해 있음.
  • 전설 : 본래 수목이 울창한 마을이었는데 농토가 협소하여 농토를 만들기 노목을 함부로 벌목 하였다 한다. 그런뒤로 환자도 많고 농사도 흉작이어서 마을 뒷산 언덕에 있는 가장 오래된 소나무를 산신령으로 모시고 제를 지낸 뒤로는 재앙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음.
  • 특기사항 : 농사에 의존 소득이 낮은 마을이며, 1961년 5월 15일 노화북초등학교를 개설.

마삭리

약200년전 최씨, 황씨가 처음 입도하여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아오다가 그후 김씨,공씨, 고씨가 입도, 마을을 형성 하였음. 1963년 11월 1일 신링에서 분리 (법령1175호)

  • 지명유래 : 갈두에서 노화로 오는데 처음 만나는 섬이라는 뜻이 초들머리섬의 한자어.
  • 전설 : 매년 제주쪽을 향하여 제를 정성껏 올리지 않으면 각종 재앙이 발생하여 해마다 바닷가에서 정성껏 제를 올리고 있음.
  • 특기사항 : 고기잡이로 생활을 영위 오다가 김양식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음

구목리

약400년전 전주이씨가 처음 입주하여 농사를 주업으로 정착하였고, 그후 1636년대에 윤선도가 보길도에 은둔생활을 하면서 농토가 광활한 이곳 마을앞 저수지를 막아 식량을 마련 하였음.

  • 지명유래 : 원 구목리는 교통의 요지라는 뜻으며 신목리에 대칭한 지명임.(1789년 작성된 호구 총수에 구항리로 표기됨)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일본식 간편한 글자로 구(舊)가 구(久)로 바뀜.
  • 전설 : 지명에 의한 기혼 - 구목리와 충도리는 구목리와 충도리라 불리웠는데 두마을 처녀 총각들이 혼인만 하면 일찍 죽거나 이혼하게 된다. 그것은 지명에 의한 기혼이며 지금도 이 전설이 이어 내려오고 있다.
  • 특기사항 : 완도광업소 - 납석광산이 50년전부터 개발되어 납석을 일본 및 대함으로 수출하고 있음.

석중리

현종대에 소안도에서 문의림이 처음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

  • 지명유래마을 뒷산이 석산중에 있어 1636년대에 윤선도가 저수지를 막을 대 돌이 많다고 하여 석중리라 하였음. 호구총수(1789)에 돌중리로 표기된 부분이 있음.
  • 전설지명에 의한 기혼 - 이 마을과 이목리는 돌위에 나무가 잘랄 수 없다하여 기혼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전설을 따르고 있다. 마을 뒷산이 명당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윤선도의 가묘가 있음.
  • 특기사항1636년대 당시 은둔 생활을 어였던 윤선도가 마을 앞바다를 막아 제방을 축조하여 넓은 농토를 조성하였고, 마을앞에 저수지를 막아 농사 짖느데 불편함이 없어 식량자급자득에 큰 몫을 하고 있는 지역임.

동고리

1650년경 제주고씨 고응항이 강진에 이주, 농사를 짓기 위하여 마을위에 조그마한 저수지를 막고 생활을 함으로서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노화도의 동쪽 끝에 있다하여 동고리라 하였음. 호구총수(1789)에 동고지(東古旨)로 기록됨
  • 전설 : 마을 동쪽 앞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마을에 재앙이 있을때에는 이 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음.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재앙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전 주민이 횃불을 들고 이곳으로 모여 굴속에 횃불을 넣어서 잡귀를 몰아냈다는 전설이 있음
  • 유물유적
    • 동백선생백도윤기념비 : 육영사업에 공적이 있어 학구민이 입비.
    • 유학백도주기념비 : 권업교회하여 1938년 초건했던 것을 중수.
  • 특기사항 : 동고리당(일명 작은당) - 이득한 옛날부터 마을 중앙에 팽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정초에 축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음.

천구리

광해군대에 사화를 피하기 위해 최수익이 입주하여 마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며 생활한 것이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정호의 물맛이 좋아 샘구미라 불러우다가 그후 생구리라 하였음. 호구총수(1789)에 천구미로 기록됨. 천구미로 개칭되고 여동(여개동)이 편입됨(1917년)
  • 전설 : 마을의 포구가 발달하여 파시가 형성되었으며 이 마을 처녀들이 손수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하여 이 마을 처녀들이 처녀 뱃사공이라 불렀음.
  • 특기사항 : 포구가 발달하여 파시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김양식으로 소득이 많은 지역임.

충도리

효종대에 정여립이 사화를 피하기 위하여 입주,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마을 산형이 벌레모양 같다하여 리명을 충도(蟲島)라 하였으나 그후 많은 사람들이 벌레 형국은 불길한 것이라 하여 충도(忠島)리라 개칭하였음 호구총수(1789)에 忠島라는 독립된 도서로 기록됨
  • 전설 : 지명에 의한 기혼 - 구목리와 충도리는 구목리와 충도리라 불리웠는데 두마을 처녀 총각들이 혼인만 하면 일찍 죽거나 이혼하게 된다. 그것은 지명에 의한 기혼이며 지금도 이 풍습이 이어 내려오고 있다.
  • 특기사항 : 갯펄을 막아 노하도에서 농경지가 제일 많은 곳이며 1970년대에는 300여 세대의 많은 주민이 살았으나 점차 줄어들어 2003년 현재는 142세대로 줄어듬.

내리

350여년전에 곡탁공씨가 입주하여 왔으나,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해남으로 이주하고 그후 김씨, 용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하였음.

  • 지명유래 : 마을 지형이 양쪽에 능선이 있고, 따스하다하여 내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 전설 : 바위섬의 전설 - 3년마다 이 바위섬 부근을 지나가는 선박이 섬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나므로 이 마을에서 매년 정초 당산제를 지낸후 이 바위섬 부근에 소 머리를 바쳐 사고를 예방한다는 전설이다.
  • 특기사항 : 1945년 9월 1일 이도초등학교가 현위치에 개설. 김양식으로 소득이 높은 마을임.

어용리

1700년대에 홍천 용씨가 처음 입주하였고,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면서 정착, 천혜의 어장지가 되어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큰 고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할 때 뛰는 것 같다하여 어섭성용(漁燮成龍) 의 준말로 어용리라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음.
  • 전설 : 큰 고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할 때 게가 꼬리를 잘라버려 승천하지 못하였으며 잘린 곳이 터진 목(뱀목)이라하고 여의주를 뱉아 버린 곳이 귀막섬이라 했으며, 이 섬에는 인재가 나지 않고 재목이 없다는 전설이 전해진다.큰 고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할 때 게가 꼬리를 잘라버려 승천하지 못하였으며 잘린 곳이 터진 목(뱀목)이라하고 여의주를 뱉아 버린 곳이 귀막섬이라 했으며, 이 섬에는 인재가 나지 않고 재목이 없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특기사항 : 90여년전 등대가 설치되어 지금가지 운영되고 있으며 생활권은 해남 송지면과 밀접함 정초와 대보름에 도여민이 무사와 풍어를 기원하면서 제주도 앞바다를 향하여 제를 올리고 있음. 어용도, 대장구도, 대제완도의 도여군으로 형성되어 있음

방축리

광해군때 김해민 김경현이 사화를 피하기 위하여 이곳에 입주하였으며 그후 경주인 이창래, 밀양인 박득린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음.

  • 지명유래 :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어서(방죽지) 방죽리라 불리어 오다가 방죽으로 바닷물이 들어와서 피해흘 입으므로 그곳을 축조하여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방축리라 하였다 함.
  • 전설 : 보길면 정자리의 공알 바위가 흔들리면 방축리 처녀들이 바람난다는 전설에 부녀자들이 공알바위가 흔들리지 않게 돌로 괴었다는 전설이 있음.
  • 유물유적 : 소나무-200년생, 수고 16m, 둘례 3.5m
  • 특기사항 : 1964년 8월 24일 노화읍사무소 이도출장소를 방축리에 개설하였음 옛날에는 어려운 생할을 하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양식 개발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음

서리

효종대에 인동장씨가 처음 입주하여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면서 정착.

  • 지명유래 : 서리의 섬 명칭이 서넙도로 넙도의 서쪽 섬이라는 뜻으로 서리읍도로 칭함 - 호구총수(1789)년. 섬모양이 “게”같아하여 가도(게의 사투리)라고 부르다가 서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서리라 하였음
  • 특기사항 : 매년 섣달 그믐에 도서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으며 김양식으로 소득이 높아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음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담당부서 :  노화읍 이재선
  • 연락처 : 061-550-6261
  • 최종수정일 :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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