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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보길면의 유래

(송하진 교수의 ‘보길도 지명의 조사 연구’ 논문에서)

보길도(甫吉島) - 배골두, 보고리, 보고래

보길도’라는 표기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등장하고 있어 그 구전 명칭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전래 고유어 지명을 고산(孤山)이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추측한 것은 잘못이다.

‘뵈골두~배골두’라 부르는 학설

바구리의 옛말 ‘보고리’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보길도는 백도 쪽을 제외하면 바구니 모양이다. 인근 도서민들이 바구리 섬이라고 부르곤 했다.

‘보고래’로 부르는 학설

보+가래’로 분석될 것으로 보인다. ‘보’는 나무와 관련된 형태소로 짐작되며, ‘삽’을 뜻하는 고어로 보인다. 나무로 만든 보습의 방언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습이란 쟁기를 뜻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영암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 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부자는 월출산에 있는 한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군데가 있는데 10군데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군데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이 섬을 보길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보길면의 연혁

  • 1896 年 고종 33년 설군으로 보길면 설치
  • 1914年 3月 노화면으로 통합
  • 1980年 12月 1日 노화면이 노화읍으로 승격
  • 1982年 10月 1日 보길출장소 설치
  • 1986年 4月 1日 보길면으로 승격

마을유래

백도리

백도리는 속칭으로 부르던 이름은 백두였으며 우암 송시열선생이1689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선백두 글쓴바위에 남겨놓은 시귀에 의하면 백도(白島)로 기록되어 있다.백도리 주변에 있는 바위들이 흰색으로 되어 있어 하얀섬같이 보인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지명유래
  • 선백두, 안백두 : 백도리에서 맨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
  • 활합 : 활같이 굽었다 하여 붙인 이름
  • 술입금이 , 샛막끝 , 홀등 , 조금포 , 도치금이 , 바닥금이
  • 코끝머리 : 지형이 코끝같이 나왔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 주변을 말한다.
  • 갯등 , 웃침, 아랫침
  • 오지여끝 : 오지여가 있는 곳으로 오지까마귀가 많이 살고 있어서 오지여라 한다.
  • 황샛여 , 청산여 , 보튼여 , 오릿여
  • 목냉기 : 구멍바구 옆에 있는 지역으로 조수가 완만한 지역이다.
  • 물땅구석 , 골발개 , 집념
  • 버던등 , 터안 , 지름박등
  • 파장끝 : 길다란 파도가 밀려오는 곳이라 해서 파장(波長)끝이라 한다. 글쓴바구 주변
  • 발막금이 : 선백두 해안에 있는 지역으로 백도리에서 처음으로 김발을 막았다 해서 발막금이라 한다.
  • 용치끝 : 동치섬 앞에 있으며 간만의 차가 심해서 갯벌이 많이 노출된 지역
  • 믹날(미역날) , 견백도 , 동치섬(東秋島, 둥치섬) , 망재봉 , 모롱재 , 백두재 , 신백두재

중리

백도리와 통리 여항 사이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리라고 불렀다. 통리, 여항, 백도, 중리의 4개 마을 중 가장 중심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명유래
  • 도치미끝 : 지역이 도끼날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 알덜밑 : 통선깨 옆에 있는 지역으로 동네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
  • 웃덜밑 , 외박골 , 선창끝 , 통선깨
  • 남풍금이 : 남풍(마파람)이 많이 부는 곳으로 선창끝 옆에 위치
  • 신추끝 , 서들박 , 다닥금이 , 굴앞 , 굴안 , 모래통 , 나루선창깨 , 외발골
  • 잿봉들 : 만박재 옆에 있으며 고개 옆에 있는 들녘이라 해서 지어진 지명
  • 소잡은굴 : 눞다란 언덕 밑으로 동네서 소를 잡을 때 이곳에서 잡았다 한다.
  • 시리여 : 물속에 있는 바위가 떡을 찌는 시루같이 생겼다해서 시루여라 한다.
  • 지북산, 만박재, 찬지꼴창, 도치샘(도끼섬), 조적바구, 상투바구, 팽마바구, 산태바구, 오릿여

여항리

보길도 지형으로 보아 주머니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해서 목덜미"項“字를 붙여서 여항이라 했고 보길도에서는 제일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古書에서도 余福項里라고 기록되어 전하여지고 있으나 倭政時에는 중통리에 속했으며 해방 후 분구 여항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명유래
  • 하늘담 : 하늬바람(북풍)이 심하게 부는 지역이라 해서 하늘담이라 한다.
  • 구렁깨 : 지형이 움푹 패였다 해서 구렁깨
  • 목섬 : 목같이 잘룩하게 생긴 섬
  • 각시바위 : 옛날에 여항리 고기잡이하는 김씨라는 어부가 고기잡이하러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아 부인이 여항남쪽 바닷가의 바위에 서서 백일기도를 올려 무사히 상봉하였다하여 각시바위라 하며 지금도 여항마을에서는 남정네들이 큰 어장을 가면 부인들이 여기서 기다리기도 한다.
  • 널샘 : 샘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널샘이라 한다.
  • 새응달 , 듸림 ,집앞끝 , 짤개 , 등굴바구 , 덜벙산(덜봉산) , 두리여 , 때깔여 , 남녀 , 목섬재
  • 용올바위 : 용이 올라간 흔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해서 붙인 이름
  • 삐둘기굴 : 목섬
  • 널샘 , 상국깨섬
  • 후박나무 : 완도군지정 제342호 보호수

통리

해안선 모양이 물통처럼 생겼다고 하여 불리운 이름이며 만조시에는 통에 물을 가득 담아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지명유래
  • 덜밑 : 언덕밑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
  • 농암 , 중북암 , 원뚝 , 큰덤 , 굴안
  • 북암: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농암 옆에 있다.
  • 북암절터 : 통리 뒷산 북쪽에 북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노승들이 도를 닦으며 올때마다 정기를 잃자 절을 폐쇄했다고 하며 현재는 승려들이 통리마을에는 시주를 받으러 가지 않고 있다.
  • 뻘당 , 듸림 , 굴안들 , 안등 , 장목석재 , 목섬재
  • 목섬짤개 : 목섬에 있는 짤룩한 바다
  • 불등 : 바람이 몹시 불어닥치는 곳
  • 굴암산 , 덜봉산 , 목섬 , 우실
  • 초랭이뫼깨 : 초랭이패(놀이패)의 우두머리가 죽어서 묻힌 지역

예송리

조선시대 현종대(顯宗代 ; 1660∼1674년)에 장흥 마씨(長興 馬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해남 윤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의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인륜도덕을 함양한다는 뜻으로 예작(禮作)이라 하였던 것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송과 예작을 합하여 예송리(禮松里)로 명명하였는데 해방이후 분구할 때도 마을민이 예의바르고 온화한 풍속을 시종 계승하고 있으며 마을주변의 소나무들도 말없이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뜻에서 예송리라 하였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常綠樹林)의 소재지이다.

  • 애들구미 :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거칠게 부딧치는 곳으로 고기잡이 배가 풍랑으로 육지를 눈앞에 두고 파선하여 어부들이 죽었다고 해서 애들업다(억울하다)해서 애들구미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일설에는 예작도(예송리 앞의 섬)과 연결이 되었으면 풍수설에 의해 대명당이 될 수 있었는데 연결되지 못해서 애들업다(억울하다)해서 붙여진 지역의 이름
  • 복생도 : 임금 왕(王)자에 점을 찍은 섬이라 해서 복생도(卜生島)라 하며 당사도 섬모양이 임금 王자 모양에서 왕이 날 섬인데 복생도가 있어 점을 찍어서 구슬 옥(玉)가 되어 왕이 나지 못했다고 해서 부르는 섬이름이다.
  • 우슬 : 천연기념물 제 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을 지칭
  • 샛바구끝 : 샛바람(동풍)이 못시 부는 지역의 바위
  • 돈방골 : 동쪽에 있는 곳짜기
  • 부엉이바구 : 노적바구 밑에 있으며 부엉이가 밤나다 우는 바위
  • 고동바구 : 고동이 항상 많이 서식하고 있는 바위
  • 헌질밑, 산신당깨, 댓가구역, 넘은대이, 치끝, 신나리, 장구미(작은구미), 큰구미, 꼬랑편, 산아동, 우대미, 샛바구, 넘은데이바구
  • 예재기 : 예송리의 옛이름
  • 범바구 , 노적바구 , 궁글바구 , 오지바구 , 도치바구 , 상투바구 , 웃샘바구 , 북암
  • 기섬 : 섬모양이 기를 달아놓은 것 같이 보인다 해서 붙인 섬
  • 질매섬 , 오동여 , 각시여 , 검덕여

월송리

월송리는 조선시대 현종대(顯宗代 ; 1660∼1674년)에 강릉 유씨(江陵 劉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철종대에 김해 김씨와 경주 정씨, 전주 이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마을의 이름은 옛날 풍수가 자기 선조의 묘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달밝은 밤에 이 마을에 들려서 "월하송림지풍(月下松林之風)에 산하초전지상(山下草田之相)이오 빈심지상(貧心之相)이다"라는 시구로서 마을 형국을 읊었던 것이 연유가 되어 月下松林를 뜻하는 월(月)과 송(松)을 따서 월송리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월숭재이 : 옛날에는 월송리를 월숭재이, 월숭정이라 불렀다.
  • 뻘땅 : 방조제를 막아 만들어진 농토, 월송리 앞 들녘
  • 한질깨 : 큰길 근처이며 월송리 앞을 통과한 큰길 근처
  • 독산재 : 험한 바위로 된 고개
  • 봉사바구 : 바위가 한길로 삐쳐 나와 봉사(장님)이 머리를 받혀서 곤욕을 치룬 바위
  • 시계바구 : 봉사바구의 그림자가 시계바위를 비추는데 그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였다 해서 붙인 이름
  • 당깨꼴창 : 하천 주위에 성황당나무가 있어 당깨또랑 또는 당깨꼴창이라 한다.
  • 조선창, 방죽깨, 한질깨, 상덤, 월뚝깨, 중원등, 장뜰, 매박골, 큰뻘, 송장바구, 농바구, 노적바구, 광대바구, 산대바구, 큰골골창, 상덤꼴창

예작리

조선시대 순조대(純祖代 ; 1801∼1834년)에 김해 김씨가 제일 먼저 입주하고 그후 다른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이 마을은 조그마한 섬마을로 이 섬의 개척자인 김해 김씨 후손들이 예의범절이 밝아 다른 사람이 모범이 되고 다음 세대에게도 영원히 계승케 한다는 뜻에서 섬이름을 예작도(禮作島)라 하였고 일제시대 때에는 에송리와 통합되었다가 해방이후 분구하여 예작리라 하였다.

  • 심재기(심재이) : 예작도를 엣날에는 섬에재기 또는 도예재기 등으로 불렀다.
  • 큰덜 : 넓은 숲과 나무가 울창한 지역을 큰덜이라 한다. 감탕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338호 지역
  • 간대잔등 : 가운데 고개를 말한다.
  • 맛바지 : 마파람(남풍)이 몹시 세차게 부는 곳으로 자래바구 위에 위치
  • 멧돼지꼴창 : 멧돼지가 살고 있다고 하는 골짜기
  • 왕달깨, 새샘밑깨, 개덕, 마파지, 산신당깨, 뒷면, 웃재넘, 샛날, 작은추(작은치), 앨산재, 귀잘, 간여다래이, 장섬마지, 짝다물이, 큰샘, 새샘, 선창샘, 왕달샘, 옹달샘, 갈림바, 꼴창, 둥글바구, 자래바구, 알방바구, 갈림바구, 호여, 농여, 고래여, 고동지(고등봉)
  • 홍합여 : 홍합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물속의 바위
  • 감탕나무 : 천연기념물 제338호 감탕나무 숲으로 할머니당나무라 한다.
  • 할아버지당나무 : 소나무를 할아버지 당나무라 한다.

청별리

청별리는 원래 부황리(芙黃里)의 일부분이었으나 어느 때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노화읍 이목리가 마주 바라보는 근거리 지역으로 보길도의 관문이고 면으로 승격하기 이전부터 면내 주요기관들이 위치한 마을이다. 1986년 4월 1일 보길도가 보길면으로 승격한 이래 모든 기관은 여기에 있었으며 87년 11월 16일자로 부용리(芙容里)에서 분구되었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 인조대(仁祖代 : 1623∼1649년)에 부용동에 은둔했던 고산 윤선도가 육지를 왕래할 때 이곳에서 배로 떠났다고 하여 청별(淸別)이란 이름이 붙여져 전해온다고 한다.

  • 청별(淸別) : 옛날 고산 윤선도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명명한 지명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보냄에 있어 사심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별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
  • 문필봉 : 붓자루를 세워놓은 것 같은 뾰족한 바위가 많이 있으며 문필봉 아랫마을이 부황리인데 문필봉으로 인해서 명필(名筆)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송장바구 : 바위가 송장처럼 길다랗게 노워있다 해서 붙인 이름
  • 한현수바구 : 바위위에 한현수(韓賢洙)라는 이름을 음각해 놓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
  • 뻘구석지 , 후노집께 , 오지바구끝 , 강씨제각깨 , 월송고개
  • 조개무덤 :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마을창고가 있다.

부황리

인조대(仁祖代 : 1623~1649년)에 윤고산이 은둔 생활을 하던곳으로 지금도 石橋 蓮池 築臺등이 남아있다. 윤고산이 제주로 가던중 정자리포에 待風하였으므로 待風口尾라하고 부황리앞에서 상륙하여 그곳을 登門이라 하였으며 떠나던 곳을 청별이라 부르고 청별은 현재 보길면 소재지이다.

지명유래

黃은 皇帝의 氣像이요 財貨를 의미한다고 하며 마을 형국이 재화의 원천을 이루고 富를 누릴곳이라하여 黃源洞이라고 했다한다. 그뒤 윤선도가 은둔 생활을 한뒤 부황리라 명명되었다 한다.

  • 성안:지금도 석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축성연대와 용도를 알 수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양마성(養馬城)이라고 하는데 제주에서 말을 육지로 운송하는 도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축성했다는 설이 있다.
  • 독다리깨 : 돌다리가 있는 부근
  • 윤배치목깨 : 윤배라는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깎은 곳
  • 초랭이번덕지 : 초랭이라는 놀이패가 놀던 잔디밭
  • 뽁주골 : 박쥐가 수없이 많이 살던 굴
  • 눈물바구 : 항상 바위 위에서 물이 흘러내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
  • 옥소암 : 고산 윤선도가 피리를 연주하게 했던 바위로서 옥필암(玉筆岩)이라 했다고 한다.
  • 물마진꼴창 : 약수터로 깊은 산중에 있으며 여름에도 발을 넣을 수 없을 만큼 찬물이 나온다. 이 물을 몸에 맞으면 만병통치한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 용치끝 , 아마시선창깨 , 청동굴 , 물마진꼴 , 선창몰 , 응달짝 , 양지짝 , 도팍구석지

부용리

인조대(仁祖代 : 1623~1649년)에 윤선도(1637년)가 제주도로 가던 중 이곳의 絶景에 끌려 제주행을 변경 이곳에 머물러 부용동이라 이름 지었고, 낙서재, 세연정, 동천석실에 기거하며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1637년 85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일곱차례나 드나들며 13년동안 머물렀다.

지명유래

마을 전체가 분지형으로 꼭 芙蓉花(연꽃)같이 생겼다하여 부용동이라 命名되어 전해지고 있다.

  • 빈동 : 옛날 사람들은 부용리는 빈동이라 했다 한다.
  • 짱바탕 : 짱치기라는 놀이가 있는데 요즘 필드하키와 같은 경기로서 공은 소나무의 옹이를 깍아 만들었으며 짱을 치는 짱채(막대기)는 "ㄱ"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놀았다고 한다.
  • 차남골 : 고산 윤선도가 차나무를 심었던 곳
  • 큰터 : 고산 윤선도의 집터 낙서재터인데 대명당이라고 해서 큰터라 한다.
  • 낸중골, 유통골, 서당깨, 뒤낭골, 모중골, 조산등, 날등, 용골, 굴바구깨, 미산(薇山), 격자산(格紫山), 광대산, 상투바구, 누룩바구, 촛대바구, 오운대, 하한대, 승룡대, 혁희대, 용두바구, 똥바구
  • 조산 : 인공으로 만들어진 산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조산이 있어야만 대명당인 낙서재태가 명당 구실을 한다 해서 산을 만들었다 해 조산(造山)이라 한다.
  • 석전대 : 거대한 암석이 쟁기로 밭을 갈아놓은 거서 같이 이랑이 만들어져 있어 석전대 또는 밭둑날이라 한다.

보옥리

1700년대 전주이씨가 처음 입주하였고 밤이면 제주도와 추자도 불빛이 훤히 보이는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 앞 뾰족산(甫竹山)해변가에 용이 기거하다가 큰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였다고 하여 보옥리라고 하고 있다.

  • 오수보리마당: 오수라는 장사가 있었는데 보통사람의 20배 이상의 짐을 지고 다녔다 한다. 하룻밤에 온동네의 그많은 보리를 지게로 져다가 산중에 부려놓고 보리타작을 했다 해서 오수보리마당이라 한다.
  • 뾰죽산: 산이 뾰죽하게 생긴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단 한 밖에 없는 낭떠러지가 있는 명산이다.
  • 한땀, 샛땀, 솔날동치, 지추목, 사드랭이, 러리등, 단물래기, 하누밭골, 그물다랭이, 신나리, 깻돌밭, 담배밭골, 질패짝, 깔라리, 용다랭이, 새집바구(입벌린바구), 난 바구, 양연이바구, 놀래미바구, 기와집바구, 문턱바구, 깔대바구, 담배밭꼬랑, 상노방꼬랑, 오리꼬랑, 묵은질꼬랑, 하누밭골꼬랑, 물독여, 동해여, 송곳여, 젓갈여, 끝맛잔등, 어덕맛잔등, 절잔등, 담배밭골잔등, 잿잔등, 큰망배산, 작은망매산, 어덧맛질, 끝맛질, 불무섬(冶島), 장뜰

정자리

인조대(仁祖代 ; 1623∼1649년)에 김서오가 정쟁을 피해 입주하고 그 후 고씨, 강씨. 심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윤선도가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하여 亭子里라 하였다 한다.

지명유래
  • 우두리(牛頭里): 마을의 지형이 소머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버던, 샛터, 가운데대미, 무르목질
  • 불땅 : 부처님을 모셨던 지역
  • 복골 : 보(洑)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댔던 곳. 보골에서 복골이 되었다.
  • 코들배기, 산소등, 동매, 장뜰, 간대박, 나라지끝, 비석골, 방죽안, 개죽몰, 달뜬목, 간들바구끝, 북바구, 산태바구, 산 바구, 해삼바, 돛대바구, 간들바구
  • 흔들바구 : 힘을 들이지 않고 가만히 밀어도 바위가 흔들린다 해서 흔들바위라 하였다.
  • 옥녀봉 , 고잿산 , 우두재 , 부락림 , 어새방죽
  • 숯구목재 : 옛날 숯을 굽던 곳, 지금도 많은 숯굴터가 남아 있다.
  • 두렁배미 , 수렁배미
  • 독살 : 돌을 쌓아 고기를 잡는 장치

정동리

조선시대 현종대(顯宗代; 1660∼1674년)에 창녕 조씨가 해남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그후 임씨, 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처음에는 정자리(亭子里)에 속한 마을 이었으나 주민수의 증가로 인하여 분구되면서 정자리의 동쪽에 있다 하여 정동리(亭東里)라고 하였다.

  • 불쏭골 : 촛불을 켜놓고 아들낳기를 빌었던 곳으로 밤이면 항상 불이 켜 있었다고 해서 불쓴골에서 유래된 지명
  • 달뜬목 : 달이 떠오르는 언덕으로 산지등 위에 위치
  • 돈북지렁: 동백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해서 붙인 지명, 돈북이란 말은 이 지역에서 동백이라는 말의 방언이다.
  • 짱바탕, 산지등, 갯짝지, 선창개, 황단네집밑, 다슨기미, 오밤밑깨, 당깨, 사장깨, 웃등문이, 짱들, 큰질, 새밭질, 솔섬
  • 등문 : 한자로는 등문(登門)이라도 하는데 고산 윤선도가 처음으로 보길도에 왔을 때 문을 찾아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숙구(宿拘)목재: 옛날에 옥황상제가 보길도에 내려와서 며칠간 쉬게 되었는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보길도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짐승이라는 짐승은 다 잡아 먹으므로 산신령이 호랑이를 불러다 놓고 크게 꾸짖으면서 북쪽에 가면 옥황상제님 개가 있으니 잡아 먹으면 큰 화을 입으니 잡아먹지 말라고 했다. 호랑이는 산을 헤메다가 배가 고파 북쪽산을 와보니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백상개가 잠을 자고 있었다. 호랑이는 산신령의 당부도 잊어버리고 그냥 잡아먹어 버렸다. 잡아먹은 뒤 건너산으로 뛰려고 한 순간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는 돌이 되어버렸으니 그 바위를 사호암(死虎岩)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북쪽의 산을 숙구산(宿拘山), 고개를 숙구목재라고 부른다.
  • 솔섬 : 마을앞 선착장 옆에 2,000여평의 섬이 솔섬인데 섬 위에는 30여주의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멀리서 보면 수반위에다 소나무를 군상식재 하는것처럼 보여 그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선창리

김해김씨, 초계최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후 천안김씨, 안동권씨 등 제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명유래

제주도 한라산 산신이 지리산 산신에게 초청을 받아 가던중 마을 남쪽 망매산 망월봉에서 달구경하고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보니 人民이 창성할 마을이라고 마을을 형성하게하니 신선(仙) 창성할(昌) 字를 써서 仙昌里라고 했다는 설과 경치가 좋아 선인들이 놀던곳이라하여 선창리하고 했다는 설이 있다.

  • 개안절벽 : 바다안쪽 절벽으로 높이가 30여m에 이른다.
  • 나라지끝, 파장끝, 내린면, 망끝, 양지짝, 새탄몰, 밧면, 범산, 가마봉, 망뫼봉, 복개산, 조산, 독산, 아랫깍금
  • 진작지: 짝지(바닷가)가 길다해서 긴짝지가 진작지로 되었다
  • 조대바구: 바위가 조대(담뱃대)와 같이 생겼다 해서 부른 이름
  • 포수바구: 포수가 이 바위에 앉아서 산짐승을 많이 잡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
  • 줄바구(졸바구), 농바구, 노적바구, 쉰 바구, 병풍바구, 절바구, 앙월여, 장애여, 시리여, 바닥여, 공알여, 더리섬, 옥매, 간데섬(가운데섬), 모래섬, 닭섬, 멍섬, 웃섬, 병아리섬, 텃질, 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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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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