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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장보고대사 초상화

장보고대사

장보고 대사는 약 1,200여 년 전 이곳 완도에 진을 설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로를 개설하였다. 그는 "바다를 제패하는 사람이야말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정치가이며 무역상이며 항해가 일 뿐 아니라 군사 전략가였다

장보고 대사는 신라 완도 사람으로 완도에 청해진을 창설하고 신라, 당, 일본간의 국제 해운 무역을 경영해 해상왕의 명성을 떨쳤다. 장 대사는 그의 본원 사찰로 석도의 적산, 완도의 상왕봉, 제주 등지에 법화원을 창건했다. 일본 스님 엔닌 일행은 이 절의 손님으로 오래 머물며 갖가지 편의를 받았고 장 대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귀국도 가능했다. 다시 이곳 신라 사람들이 모여 살던 신라방과 그 자치 기관이 있었다.

세월은 흘러 옛 절 모습은 간 데 없으나 양국의 우의는 영원할 것이다.
[석비문 내용]

고산윤선도가 머물렀던 유배지

고산윤선도

고산 윤선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인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 산성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의 산세의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고산연보에 의하면 이곳에 온 때는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살 때 일이다. 자연물에 각기 그 형태에 어울리도록 명명하여 자연을 벗삼았다 말년에 마지막 노경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 85세(1671)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애국선열 및 애국지사

김충홍

군내리 : 건국훈장 애족장 1944년 11월 중국 광동성 소재 일본군 제42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제9전구 제4군단 제101사단에서 활동하였다.

양회상

청산 읍리 : 건국훈장 애족장 1945년 4월 중국 북경에 도착하여 토교대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면서 활동하였다.

차태희

약산 우두리: 대통령 표창 1933년 5월 전남운동협의회 해남위원회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어 야학독서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농민의 소작쟁의 등을 지도활동하다 1934년 2월 28일 전남도경에 피체되어 1936년 12월 3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김홍남

청산 당락리: 건국훈장 애족장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고보생 가두시위에 참가하고 그후 광주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였으며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징역 6월형을 언도 받았다.

장석칠

청산 모도 : 건국훈장 애족장 1923년 청산면 모도리에 개량서당을 후원할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고 서기로 활동하다 민족운동을 실행하기 위해 일본인과 친일인에게 절대 동정하지 말며 교섭을 단절할 것을 회원들과 결의하고 일본인을 살육하여 대한민국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하며 활동하였다.

김경천

소안 이월리 : 건국훈장 애족장 1913년 소안면에서 교사로 임명되어 청소년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며 1955년까지 활동하였다.

김남두

소안 맹선리 : 건국훈장 애족장 1926년 6월 완도에서 배달청년회와 노동대성회의 간부로서 농민운동과 청소년 계몽운동을 했으며 동년 6월 15일 동지 10여명이 소안면 미라리 서당에 모여 "살자회"를 조직하고 농촌청소년들의 항일사상을 계몽하였다.
그외도 50여명의 국가 유공자가 있다.

육탄 10용사

개성 송악산 고지의 탈환을 위해 포탄을 안고 적 진지로 돌입하여 산화한 10명의 국군 장병을 가리킨다. 이들의 일화는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때의 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전쟁 전인 1949년에 일어난 일이다. 인민군 제 1사단은 1949년 5월 3일 새벽, 제 3연대 병력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하여 38도선 남쪽 100m 지점에 나란히 연결된 292고지, 유엔고지, 155고지, 비둘기고지의 4개 고지를 점령하였다. 당 지역을 방위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즉시 역습에 나섰으나, 10개소의 토치카에서 가해지는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대안을 찾던 지휘부의 어느 지휘관이 육탄 공격법을 제안했고, 사단 시설장교 박후준 소위의 고안으로 81mm 박격포탄에 뇌관을 장치한 급조 폭발물을 만들어 이를 이용해 육탄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원자를 모집한 결과 서부덕 이등상사(전사 후 소위 추서)를 공격대장으로 하는 김종해, 윤승원, 이회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의 9명이 선발되어 5월 4일 오후 2시경 육탄 돌격으로 산화함과 동시에 적 토치카의 제압에 성공하였으며, 직후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김종훈 소령의 부대가 공격을 감행하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정오 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전사 후 상사 추서)가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들고 돌진하다 전사, 앞의 9용사에 박하사를 더하여 '육탄 10용사'라 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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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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