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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소개

고금면 연혁

  • 1384년 용초리에 천씨가 입도 거주
  • 1598년 덕동에 고금진 설치 (강진에 예속)
  • 1896년 완도군 설군으로 완도군에 편입
  • 1949년 고금면에서 약산면이 분면과 동시 면사무소를 덕동리에서 농상리로 이전
  • 1977년 현 청사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고금면 유래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부속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탐진현(眈津縣)에 속해 있으면서 828년 완도에 청해진이 설치되어서 그 기간중에는 이웃 신지도와 조약도가 함께 그 관하에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1124년 탐진현에 신설된 장흥부(長興府)에 편입되어 장흥부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 1417년(태종 17년) 도강군(道康郡)과 탐진현을 합하여 강진현(康津縣) 으로 개편됨으로써 대구면 고금도로 1896년 본군이 설군되기까지 480년간 강진에 속해 있었다.고금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절략의 요충지로 1598년 2월 18일 덕동(德洞)에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수군본영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왜적을 전멸한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그 후 1600년(宣祖 33년) 소모별장(召募別將) 진을 두었 다가 곧 없애고 1673년 별장(別將)진을 베풀었다. 여기서 별장(別將)이라함은 산성(山城), 도진(渡津), 포구(浦口), 보첩(保疊), 소도(小島)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 벼슬을 말한다.

1681년 고금도진(鎭)을 덕동에 비로소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어 조약도, 평일도, 생일도 등을 관장하고 해상을 방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생일도, 평일도는 거문도진에 이속하고 1895년 7월 15일 군제개혁으로 215년간의 고금도진은 없어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도명(島名)을 고이도라고 하였는데 차차 변하여 고이도가 되었다 고금도(古今島)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여지승람 경국대전). 군이 생기기 이전 강진현에 속해 있어면서 1681년(숙종 7년)고근도진이 설치된 후부터는 호적과 사송(詞訟)은 강진현에서, 군무와 기타 행정은 고금도진에서 관장하였으며 징세(徵稅)와 행정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농소면과 남면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군이 설립된 후 1910년에 고금면으로 통합하였다.

그 당시 본 도의 총 지세(地稅)는 220結로 농소면의 95결은 강진현 호조에 봉납 하고 남면의 125결중 98결은 양청(糧廳;寧平君 地 徵稅)에 상납하고 남은 27결은 신지진 호조가 맡았으나 1886년부터 원장과 함께 관왕묘(關王廟)로 이관했다. 이관된 이 제도는 설군 후에도 둔전(屯田) 및 사토제로 존속되어 1910년까지 지속되었었다. 농상리에 두었던 고금면사무소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조약면을 폐합하여 덕동리로 면사무소를 신축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상근 집무가 시작되었다. 해방후 1949년 4월 1일 조약도가 본 면에서 분면되어 약산면으로 독립되어 나가고 면사무소는 다시 농상리로 이전하였다.

마을유래

농상리

마을형성

고려33년 공민왕 8년 기해 서기 1359년 지금으로부터 637년전에 영양천씨(潁陽千氏), 선영 남씨(宣寧南氏) 두 性이 시거(始居)하였고, 그 후 경주김씨(경주김씨), 장수황씨(장수황씨) 주거지후 점차 배씨, 박씨, 우씨 모든 성이 주거 성촌하여 마을 형성

지명유래

최초 형성 당시는 治底浦라 하였으며, 그 후 고금도내의 제일 농사촌이라 하여 農上里라 불리어 오다 1928년 마을 뒷산이 누에 형상이라 하여 農桑里라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는 大谷, 白雲, 永扶里를 합하여 農桑里라 했으나 해방후 분구했다. 1480년경 성종(成宗)대에 성산 배씨(星山 裵氏)와 남씨(南氏), 천씨(千氏)가 처음 입주하였 으며 그 후 경주 김씨 (慶州 金氏) 장수 황씨( 長水 黃氏) 경주 이씨 (慶州 李氏) 등이 이주 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옛날에는 치저포(治底浦) 또는 장치구미(莊峙九味)라고 하였으며 그 후 고금도내에 제일의 농사고장이라 하여 완도군이 창설될 무렵부터 농상리(農上里)라고 불렀다.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백운동 농상리 영부리 대곡리와 도암리의 일부와 대평리의 일부를 합하여 잠업이 성했던 곳이란 뜻으로 농상리로 이름을 바꿔 통합하였다. 현재 영부리 대곡리 석치리가 분리되어 나가고 백운동과 합하여 8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을 세운 조상격인 성산 배씨의 충효열 삼강(忠孝烈 三綱)을 추모·흠모하기 위하여 1882 (고종 19)년에 삼강문을 건립하였은데 그 10년전 1872년에 왕이 명정(銘旌)을 하사한 바 있으며 지금도 그의 13대 후손일 배기일(裵基一)이 마을의 유생들과 함께 정성껏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부리

마을형성

영조대(1700년) 강릉류씨 철희가 강진에서 관원들의 횡포에 못 이겨 고금도에 건너와 마을의 지형을 보고 자손이 번창할 곳이라 하여 안주를 결심 정착하였다고 함.

지명유래

백두루미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寒沙洞이라 하였으나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農桑里에서 분구하면서 서로 돕고 永世無窮하라는 뜻으로 永扶里라 개명하였음.

대곡리

마을형성

영철종대(1850년초) 黃閏忠이 완도군 신지면에서 살다가 처음 이주하여 왔으며, 차차 제성들이 입주하면서 성촌하기 시작했다.

지명유래

맑고 깨끗한 샘(井) 아래 성촌하는 마을이라 하여 井下ㄹ里라 불러 오다 1935년 농상리에서 분구하면서 朴仲來, 李明東, 黃哲石 3인이 마을 뒷산의 형세가 大字와 같다하여 大谷里라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음

석치리

마을형성

서기 1886년대에 진양천씨가 이주하여 왔으나 곧 이가하였고 서기 1893년 밀양박씨 박노공이 본면 청룡리에서 살다가 인근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여관업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으며, 서기 1948년 면소재지를 덕동리에서 농상리로 위치 변경하면서 상업 중심의 대촌으로 형성되었음

지명유래

농상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큰 바위가 깔려 있어 독백이라 불리어 오다 서기 1949년 4월 약산면이 분면하고 면소재지를 농상리로 위치변경하면서 石峙라 부르게 되었으며, 농상리 제1.2반으로 운영하여 오다가 1986. 7. 7 농상1부, 영부 1부를 합하여 옛 지명 그대로 石峙里로 분구하였음.

일덕암리

마을형성

효종때(1650년초) 경주이씨 李得重이 전남 장흥에서 살다가 이주하여 왔으며 평야지가 많고 산세가 좋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음

지명유래

형성 당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지가 많다고 하여 大平里라고 불리어오다 한일합병후에는 德岩山下에 성촌하는 마을이라 하여 덕암리라 개칭, 해방과 더불어 덕암리를 분구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음

이덕암리

마을형성

1730년대 말에 장수황씨 황도정이 一德岩里寺洞에 살다가 큰 집서 분가하여 冬栢亭으로 처음 이주하여 왔으며, 차차 柚子洞과 東村에 제성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음

지명유래

冬栢亭, 柚子洞, 東村을 합하여 해방후 德岩里에서 분구함.

  • 冬栢亭 - 東栢나무가 많고 맑은 샘이 있다하여 전해짐
  • 柚子洞 - 유자가 많은 고장이라 하여 유래됨
  • 東 村 - 마을 동편에 위치했다 하여 부르게 됨

도남리

마을형성

1憲宗代(1830년대초) 金海金氏 金敬華가 고금면 현 富谷里(당시 掘木里)에서 이주하여 마을 형성

지명유래

마을 뒷산에 계수나무가 많아 桂洞이라 불리었으며, 한일합병후 桂洞, 莊豊, 掘木, 尺贊, 燕洞 모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한 길목이 형성되었다 하여 道南里로 개칭 里事務所를 桂洞에 두게 되었으며 桂洞과 掘木을 一道南, 莊豊과 燕洞을 二道南이라고도 하였으며, 莊豊里와 燕洞을 분구하고 道南里에거 富谷을 분구하였다

장풍리

마을형성

마서기 1650년대초 冠山任氏가 처음 이주하여 와 부자가 되어 육지로 이주하여 갔으며 같은 해 丹陽禹氏 光泰란 분이 慶南 河洞에서 반대파의 謀略으로 화를 면하기 위하여 방방곡곡 방황하다 본 마을의 물이 좋아 농사짓기가 좋을 것으로 판단 정착하였다 함.

지명유래

冠山任氏가 입주하여 부자가 되므로 마을명을 藏財洞이라 하여 왔으나 1952년 道南里에서 분구하면서 가뭄에도 물이 좋아 언제나 豊年이 든다하여 莊豊里라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음.

연동리

마을형성

서기 1800년대초 김씨가 이주하여 수년간 거주하여 왔으며, 洪秉禮씨가 湖洛士禍에 연류되어 이곳 유배, 謫居生活하면서 서당(글방)을 만들어 이 지역 목민들의 학문과 관혼상제,지리,의학, 문술등 여러가지 학술을 전수키 위하여 각 성씨들이 모여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함.

지명유래

純祖11年(1811년)  南 洪秉禮씨가 귀양살이 하면서 이 지형이 처마밑 제비집(燕菓形局)과 같다하여 燕菓洞이라 불리어 오다가 燕菓字를 略하여 燕洞이라 부르고 있다

척찬리

마을형성

縣宗代(1660년대초)에 南平成氏, 南平房氏가 이주하여 와 마을 남쪽에서 거주하였으며 수산업을 하다가 육지로 나갔으며 그 후 제성씨들이 이주하여 와 마을을 형성

지명유래

형성 당시 自易島라 하였다가 그 후 自贊島라 칭하게 되었다. 한일방병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갱치도 사업을 추진 당시(1910∼1918년) 중앙에서 내려온 측량기사 이씨가 自贊島의 지명은 좋이 않으니 尺贊이 좋겠다고 자기 임의로 측량도면에 拓贊島라 表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부곡리

마을형성

연대 미상으로 고금도에 인구가 입도하여 차츰 생활이 정착함에 따라 부곡리는 면내에서 가장 다습하고 척찬도를 방파제로 척찬도와 연륙이 되지 않았을 때는 아주 좋은 어장지로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큰마을이었다고 함. 농사가 발달함에 따라 농지를 찾아 차츰 사람들이 떠 나고 아주 작은 마을로 남게 됨

지명유래

마을이 굴처럼 포근하여 屈木里라 전하여졌으며 1967년에 道南里에서 분구하여 마을명을 富谷里라 칭하였음.

회룡리

마을형성

효종대(1650년대초) 진주강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고 현종대에 반대정파에 쫒기어 경주이씨, 경주김씨, 창녕성씨, 밀양박씨가 들어와 은거하면서 성촌하기 시작하였다.

지명유래

바닷물이 산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라 하여 {볼바}라 불리어 오다 한일합병후 행정구역 개편 당시 李壽鎔씨가 본 마을은 용이 도사리는 것과 같다하여 回龍里로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암리

마을형성

효종대(1650년대초) 진주강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고 현종대에 반대정파에 쫒기어 경주이씨, 경주김씨, 창녕성씨, 밀양박씨가 들어와 은거하면서 성촌하기 시작하였다.

지명유래

바닷물이 산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라 하여 {볼바}라 불리어 오다 한일합병후 행정구역 개편 당시 李壽鎔씨가 본 마을은 용이 도사리는 것과 같다하여 回龍里로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중리

마을형성

英祖代(1720년대말) 경주이씨 李應春이 본 면 駕轎里 飮馬洞에서 수산업을 하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평야지를 찾아 본 마을로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지명유래

長登山 아래 성촌하는 마을이라 하여 진중매라 불리어오다 1948년 회룡리에서 봉암리와 분구 하면서 장중리라 개명하였으며, 서기 1951년 봉암에서 다시 분구하였다

상정리

마을형성

孝宗代(1650년대초) 진주강씨, 이천서씨가 처음 이주하여 와 마을을 형성하였고 현재는 면내에서 으뜸가는 대촌을 이루고 있음

지명유래

지형이 아홉구미로 나누어 불린다하여 상구미라 하였으나 아홉구미의 松林이 울창하여 下有成 村地이고 마을앞 높은 곳에 정자나무가 있어 上亭里라 하였다

봉명리

마을형성

孝宗代(1650년대초) 연안명씨가 처음 입주하였고, 그후 장수황씨, 남양홍씨, 김해김씨가 이주 하여 와 성촌하였다.

지명유래

마을형성 당시 마을앞 해변 중앙에 나무가 많아 中木洞이라 하였으나 한일합병후 봉명리로 개명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鳳"은 봉황산의 봉을 뜻하고 "鳴"은 마을앞 바닷가 바람 기운이 있을때 운다고 하여 봉명리라 했다

장항리

마을형성

철종 6년 을묘(1855)에 김해 김씨가 시거하였고, 그후 경주 이씨 4형제가 주거성촌 하였다.

지명유래

봉황산 기슭아래 자리잡고 있으며, 동네를 노루목이라 불렀다. 노루목이라는 하는 뜻은 지형이 노루목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성리

마을형성

약 300년전에 평양인이 처음 입주하여 산밭을 개간하여 수박, 참외를 재배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후 농상리에서 김해 김씨가 이주하고 여러성씨가 입주하여 성촌하였다.

지명유래

바위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독바위라 불러오다 1970년 장항리에서 분구하면서 봉황산에 성촌 하였다하여 봉성리라 하였다.

칠인리

마을형성

진주 강씨가 처음으로 거주하고 그후 밀양 천씨가 주거하면서 칠중매라 불렀다.

지명유래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일곱 마리의 새(매, 참새매)가 내려오는 것 같은 형국이라 하여 철중매라 불렸다.

청용리

마을형성

현종대(1672년) 밀양박씨 朴台錫이 강진에서 살다가 고금도로 입주, 산세가 아름답고 지형이 따뜻하게 생긴 雲洞에 정착한 후 김해김씨, 경주이씨, 해주오씨등이 차차 마을 형성(처음거주지: 如雲洞-청용리434번지, 草場洞-청용리140번지)

지명유래

형성 당시에는 망중산하에 조그마한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龍池洞이라 불리었으나 乾川里라고도 불렀다한다. 이는 川은 물이 있으나 물이 흐르지 않은 천이라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한일합병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靑龍里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름.

  • 여은내(如銀川) - 은하수 같은 냇가를 뜻함
  • 건천리(乾川里) - 냇물이 쉽게 말라 항상 마른 상태의 마을
  • 용지동(龍池洞) - 용나무골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연못이 있어 칭함.(1896년)
  • 청용리(靑龍里) - 용나무골 산등이 용의 등처럼 굽어 있어 칭함(1914년),현 자연마을 청용리 청학리,용초리의 통합명칭이며 1950년에 통합행정하다가 청용,청학만으로 분구되고 용초를 청용리 6반으로 두었다가 근래에 분구됨.

청학리

마을형성

효종대(1650년대 중반) 平山申氏 申永玉이 해남에서 살다가 관원들의 횡포가 심하자 이를 피하여 고금도에 들어와 본 마을에 처음 살았으며, 그 후 김해김씨, 인동장씨, 연안차씨등이 이주하여 왔다

지명유래

리명을 佛堂谷이라 하였으나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靑鶴洞, 雲洞, 日帳里를 합하여 학이 많이 찾아든 마을이라 하여 청학리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용초리

마을형성

본마을은 우리면에서 가장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말엽 천씨가 개벽 거주인으로 입도 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 뒤 1650년경 서촉 명시 두형제가 해남에서 이주하여 형은 용초에 아우는 이웃 봉명에서 살았다고 전해져 오고 있음

지명유래

마을 뒤 백운산과 지남산의 주봉과 기봉사이에 용치가 있는데 마을이 주변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 싸여 있고 용치 위에 마을을 향해 치솟은 바위가 지계곡출룡승천하는 형상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용추리라 하였다.

가교리

마을형성

명종대(1650년대초) 진주강씨가 처음 입주하여 왔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그 후 김해김씨, 경주정 씨등 제씨가 이주 마을을 형성.

지명유래

산의 준령이 아홉(九)마리의 말이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것과 같다하여 駕馬九尾라 하였으나 그 후 駕轎里를 東里, 轎城里를 轎東里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일합병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리를 합하여 지형에서 駕와 轎를 따라 駕轎里라 개명하였으며 해방후 轎城里를 분구하였다

교성리

마을형성

盆城裵氏 裵達宰가 전남 강진에서 살다가 관원들의 횡포에 못 이겨 관원을 구타하고 보복이 두려워 고금도에 피신하여 본 마을을 둘러보고 후손들이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안주를 결심 정착하게 되었다함.

지명유래

형성 당시 지형이 가마의 형태와 같다하여 轎洞이라 불리어오다 한일합병후 駕轎里에서 분구하면서 마을 뒷산 서쪽에 옛성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본 마을을 金基仁씨가 轎城里라 칭하여 현 재에 이르고 있음.

세동리

마을형성

正祖代(1780년대초) 경주김씨 金旭이 본 면 農桑里에 거주하다가 분가하여 와 산업을 하기 위해 정착하였음.

지명유래

마을 前下端部에 堤防이 築造되기 전 마을과 앞산이 거리가 좁고 길게 늘어져 바닷물이 한류할 당시 가는 개라 불리어 오다 한일합병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細洞里라 하였음.

항동리

마을형성

英祖代(1770년대초) 경주김씨, 인동장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다. 인동장씨 張大伯의 차남 張漢樞가 수산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정착하면서 차차 입주 성촌하였다.

지명유래

사람이 번번히 왕래하지 않은 곳이라 城內洞이라 불리어 오다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후 細 洞里 에서 분구하면서 마을에 모든 액운을 마을앞 {목섬}이 막아준다하여 項洞으로 개명 현재에 이 르고 있음.

내동리

마을형성

景宗代 박씨, 김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나 곧 이주하여 갔고 英祖代(1770년대초) 밀양박씨 朴秉鎭 이 본 면 청용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했음.

지명유래

東西南北 四方中 東쪽만 트여 옆든개라 불리어오다 해방후 세동리에서 분구하면서 당시 마을 하단부에 간척사업자였던 朴英憲이 서남북이 막혀 난을 피한 마을이다 하여 內洞으로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음.

신장리

마을형성

서기 1863년대 밀양손씨 대부가 본 면 德洞里에서,경주김씨가 본 면 莊豊里에서 각기 문중의 전답을 경작하기 위하여 이주하여와 정착하게 되었음.

지명유래

갈대가 우거진 바닷물을 건너서 들어사는 마을이라 하여 "섭재"라 불리어오다 1952년 세동리에 서 분구하면서 薪場里라 개명하였는데 마을명의 뜻은 東部管內 주민들의 연료를 해결해 주는 場이라 함.

덕동리

마을형성

1宣祖代(1590년대말) 밀양박씨, 경주이씨, 동복오씨가 처음 입주하여 왔다.

지명유래

덕망있는 사람이 많이 사는 고을이라하여 德洞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 이충무공이 고금진을 설치하고 本陣이 德水라 하여 德洞이라 하였다는 양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음.

윤동리

마을형성

孝宗代(1650년대초) 선녕남씨, 광산노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다. 이들은 입주와 더불어 염전에서 소금을 내는 일을 하였으며, 차차 제성들이 입주하여 성촌하였다

지명유래

덕동리에서 동쪽 끝에 위차한 마을이라 하여 동끝이라 불리어 오다 1952년 덕동리에서 분구하 면서 孫道彬이 윤택한 마을을 만들고자 潤洞里라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충무리

마을형성

1842년대 밀양손씨 權五가 덕동리에서 살다가 처음 이주하여 왔으며 차차 덕동과 세동에서 제성씨들이 이주하여 와 성촌하였음.

지명유래

王墓碑가 있는 섬이라 하여 廟堂島라 불리어오다 1971년 덕동리에서 분구하면서 충무사를 따로 忠武里로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음.

화성리

마을형성

1919년대 남원양씨 梁元伯이 본 면 덕동리에서 거주하다가 처음 이주하여 와 정착하게 되었다 함.

지명유래

정유재란 당시 於蘭萬方이 충무공의 지시를 받고 본 마을에 井戶를 개발 水軍將兵들의 식수난을 해결하였다 하여 旅蘭井이라 불리어 오다 1966년 덕동에서 분구하여 세동리 金洪濟씨가 화목하 고 단결심이 좋은 마을이라 하여 和城里로 개명 현재에 이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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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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